달이 차오르듯
기사 본문
달이 차오르듯
달이 차오르는 만큼, 사랑도 깊어지기를
보리를 넣고 맑은 육젓으로 우려낸 국물에 입안 깊숙이 감칠맛을 머금은 열무김치. 속배추 김치.
정갈하게 보내주신 누룽지와 마주 앉아 한 술 뜰 때마다 소박한 음식 하나에도 사람의 마음이 얼마나 오래 머무를 수 있는지 새삼 느낀다.
언니는 투박하지만 진솔하다. 한번 마음을 내어준 사람에게는 세월이 흘러도 붉은빛 사랑을 거두지 않는다.
그 깊은 정을 받을 때마다 고맙고 또 미안하다.
나도 그 사랑의 백분의 일이라도 되돌려주며 살고 싶지만 돌아보면 늘 받은 것이 더 많다.
화려하지 않아도 오래 끓인 진국처럼 깊은 사람.
산 아래 한결같은 언니와 보일 듯 말 듯 조용한 자리에서 변함없는 마음을 건네는 동생은 내 안에서 다시 삶의 원동력을 길어 올리게 하는 샘물이다.
한때 건강했던 소울메이트가 억척스러운 전사처럼 쉼 없이 일을 하다가 정작 가장 소중한 몸의 신호를 뒤늦게 알아차린 모습을 보며 사람이 얼마나 쉽게 삶의 중요한 것을 뒤로 미루며 사는지 생각한다.
저마다 오색의 사연을 짊어지고 살아가는 사람들. 굽은 어깨마다 말하지 못한 이야기가 있고 거친 숨 사이에도 지켜내고 싶은 사랑이 있다.
나이가 들어도 마음 한켠에 여소녀로 남아 있는 그들에게 세상이 조금 더 다정했으면 좋겠다.
내가 그 삶의 점선 위에 잠시라도 따뜻한 손을 얹을 수 있다면 좋겠다.
붉은 국산 고춧가루가 코끝을 찡하게 하는 김치의 참맛을 보내주시는 팔순을 향한 가족회관 어머니.
음식에는 손맛만 담기는 것이 아니라 그 음식을 만든 사람의 시간과 정성과 안부까지 함께 담긴다는 것을 배운다.
한가위는 오래전부터 수확한 곡식과 열매를 나누며 풍요를 감사하고 멀리 흩어진 가족이 한자리에 모여 조상과 서로의 안녕을 살피던 때였다.
달이 가장 풍성하게 차오르는 날, 우리도 삶에서 무엇이 정말 풍성한 것인지 돌아본다.
이번 추석에도 딸네 사돈과 함께 머물 파파실언덕. 말없이 품어주는 언덕과 계절마다 제 몫의 열매를 내어주는 텃밭.
돌아갈 곳이 있고 기댈 어깨가 있다는 것은 인생에서 얼마나 큰 은총인가.
돌이켜보면 우리는 함께 찬양하며 어둔 시간을 건넜고 어깨동무하며 험한 산과 거친 골짜기를 지나왔다.
사람의 힘만으로 여기까지 왔다고 말하기에는 설명할 수 없는 보호하심이 너무 많았다.
때로는 죽음 가까이에서 생명의 쪽으로 방향을 돌려주시고 무너질 듯한 순간마다 다시 일어설 힘을 주셨던 하나님.
돌이켜보면 기적은 언제나 요란한 모습으로 오지 않았다.
한 끼의 따뜻한 밥으로, 한 사람의 손길로, 끝내 끊어지지 않는 인연으로 조용히 우리 곁에 머물러 있었다.
남은 날들도 잘 버텨내기를. 아직 내게 맡겨진 삶의 과업들도 서두르지 않되 끝까지 잘 완수하기를.
아웅다웅하며 거친 숨을 몰아쉬었던 순간들도 지나고 나면 삶이라는 긴 강물의 한 굽이였음을 알게 되리라.
그러니 오늘도 서로를 너무 다그치지 말자.
조금 늦어도 괜찮고 잠시 쉬어도 괜찮다. 다시 한바탕 살아낼 힘만 남아 있다면.
추석 달이 차오른다. 사랑으로 길러주신 엄마가 유난히 그리운 날이다.
세월이 아무리 흘러도 엄마라는 이름은 마음 한가운데 남아 달빛처럼 조용히 나를 비춘다.
생각해보면 삶의 결론은 그리 복잡하지 않은지도 모른다.
사랑받고 있다는 것. 사랑하고 있다는 것. 어쩌면 그것이면 충분하다.
그 사랑을 잊지 않고 오늘을 살아내는 것, 받은 온기를 누군가에게 다시 건네는 것.
그것이 우리가 이 세상에 머무는 동안 할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일인지도 모른다.
밝은 달아, 새벽까지 넉넉히 차올라라. 우리의 지친 마음마다 달빛 한 줌씩 내려놓고
아픈 사람에게는 회복을, 외로운 사람에게는 따뜻한 인연을,
길을 잃은 사람에게는 다시 걸어갈 빛을 비추어다오.
그리고 하나님, 우리의 남은 길도 지켜주소서.
이번 한가위에는 누구 하나 크게 아프지 않고 누구 하나 마음을 잃지 않고 모두가 무탈하게, 모두가 평화롭게, 각자의 자리에서 다시 살아갈 힘을 얻기를.
차오른 달처럼 우리의 사랑도 모자람 없이 차오르기를.
사랑받고 있어요. 사랑하고 있어요. 그것으로 오늘도 충분히 감사합니다.
글/김영란 교수
hanbitinews@naver.com
저작권 Ⓒ (한빛국제뉴스)무단전재 및 재 배포 금지
후원:(하나은행)702-911245-65807 예금주:한빛국제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