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디 아프지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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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디 아프지마라
글은 내 마음의 샘물을 길어 올리는 두레박 같았다. 한 줄 한 줄 써 내려가다 보면 마음 깊은 곳에 가라앉아 있던 생각이 떠오르고, 미처 이름 붙이지 못했던 감정이 비로소 말을 얻었다. 글을 쓰고 나면 감사라는 무지개가 마음에 걸렸고, 가슴 밑바닥에서 오래 잠들어 있던 희열의 씨앗도 조용히 싹을 틔웠다. 때로 글은 번득이는 지성의 칼날이 되었고, 때로는 내 안에 감춰진 보화를 찾아가는 작은 발판이 되어주었다.
그런 글의 깊은 결을 따라와 한 올 한 올 마음으로 읽어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 읽고, 답하고, 때로는 말없이 들어주는 그 마음 앞에서 나는 삶의 진수를 조금씩 배웠다. 누군가의 관심과 공감은 한 사람을 다시 살아가게 하는 에너지가 되기도 한다. 그 고마움은 다시 내 안에서 자라 가르치는 자리에서는 소명이 되고, 만나는 사람에게는 마음을 움직이는 한마디가 되었다. 내가 건넨 작은 문장이 누군가의 심리적·영적 자아에 작은 파문 하나 일으킬 수 있다면, 그 또한 내가 살아가는 이유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글은 그렇게 사람과 사람 사이에 길을 냈다. 글로 마음을 나누고, 마음을 나누며 관계가 깊어지고, 그 관계는 어느새 수십 년의 시간을 건너 서로의 안부를 묻는 하나의 길이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한동안 멈춰 서 있던 나를 궁금해하며 조용히 날아온 스승님의 한 통의 편지. 그 한 통의 편지가 다시 나를 삶의 자리로 불러 세웠다. 나는 또 삶에 답을 쓰기 시작한다.
인생의 근원을 조금 더 들여다보고, 거창한 결심보다 매일의 성실함이라는 작은 끈을 다시 손에 쥔다. 돌아보면 사랑이었다. 뒤돌아보면 나를 도와주고 아껴주었던 사람들의 온정이었다. 그리고 다시 바라보니 내 삶의 발자국 사이사이에 남아 있는 것은 결국 인정과 감사였다. 사람은 혼자 완성되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살아온 날들이 조금씩 가르쳐준다. 내가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것은 나의 의지만으로 이루어진 길이 아니었다. 건네받은 마음이 있었고, 기다려준 시간이 있었고, 말없이 곁을 지켜준 사람들이 있었다.
그래서 오늘도 받은 것을 기억하며 살아가고 싶다. 그리고 언젠가 내가 누군가에게 그런 사람이 되어 있기를 바란다. 가을의 창문이 열렸다. 바람이 한결 서늘해지고 나뭇잎의 빛깔이 깊어지는 계절. 계절이 바뀐다는 것은 무언가를 내려놓는 일이면서 또 다른 시간을 받아들이는 일이기도 하다. 그러니 오늘은 지나온 날들을 탓하지 않고, 다가올 날들을 서두르지 않으련다.
그저 지금 내 곁에 있는 사람을 소중히 여기고, 오늘 주어진 하루를 정성껏 살아내며, 받은 사랑을 다시 사랑으로 돌려보내고 싶다. 고맙습니다. 오늘도 함께라는 이름으로 서로의 어깨를 가만히 기대며 환하게 웃을 수 있어서 고맙습니다.
가을이다. 부디, 아프지 마라.
글/김영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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