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다는건 이런거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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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다는건 이런거겠지?
백일홍의 선명한 빛깔이 하천 어귀마다 고운 풍경을 수놓았다. 걸음을 멈추고 한참을 바라본다. 아름다움은 때로 우리를 멈춰 세우고, 감사는 그 풍경을 마음에 오래 머물게 한다.
문득 한 편의 시가 차오른다.
"감사만이 꽃길입니다. 누구도 다치지 않고 걸어가는 향기 나는 길입니다."
마음의 숲에는 오래전 건네받은 따뜻한 말 한마디, 누군가의 손끝에 담긴 정성, 함께 웃고 돌아서던 저녁의 풍경들이 고운 기억으로 차곡차곡 쌓여 있다. 그 기억들을 따뜻한 언어로 다시 꺼내어 마음과 마음 사이를 흐르게 하는 일, 그것이 삶을 건강하게 순환시키는 작지만 아름다운 순기능이 아닐까.
땅의 결실을 아는 작은 시골 교회 사모님. 스무 살 꽃봉오리 같던 시절에 만났던 그녀가 어느덧 마흔일곱이 되었다. 세 아이를 낳고 키우며 전사처럼 씩씩하게 삶을 일구어 온 사람. 그 부지런한 손으로 고구마를 캐고, 산에 올라 알밤을 한 소쿠리 가득 주워 담아 정성껏 안겨 준다.
수확의 기쁨을 혼자 누리지 않고 기꺼이 나누는 마음. 그 손길 앞에서 사랑이 무엇인지 다시 배운다. 사랑은 거창한 말이 아니라 내가 가진 것 가운데 나눌 것을 찾아 상대의 품에 놓아 주는 일이구나. 흙에서 얻은 결실이 사람에게로 흐르고, 사람의 정성이 또 다른 사람의 감사가 된다. 그렇게 나눔은 돌고 돌아 우리의 삶을 넉넉하게 한다.
밤을 골고루 나누어 먹으니 복이다. 알밤의 고소함보다 더 깊은 것은 그 안에 담긴 마음의 온기다.
계룡에 사는 품이 넉넉한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열 명이 함께 가고 싶은데, 항아리 바비큐 좀 해 줄 수 있을까?" 이런저런 설명도 필요 없었다. "그래, 좋아!" 두말할 것 없이 건네는 그 한마디에 이미 저녁의 따뜻함이 시작되었다.
뜨거운 열을 견뎌 낸 항아리 속에서 정성껏 익어 나온 고기. 그 맛은 특별했지만, 진짜 진미는 음식 너머에 있었다. 사람을 맞이하기 위해 불을 지피고, 함께 먹을 자리를 마련하고, 누군가의 즐거운 하루를 위해 기꺼이 자신의 시간과 수고를 내어놓는 마음. 음식의 맛은 솜씨에서 나지만 식탁의 풍요로움은 사람의 마음에서 나온다.
넉넉한 친구 곁에서 모두가 나눔이 주는 복을 함께 누렸다. 여기에 싱싱한 대하까지 챙겨 온 또 다른 친구의 세심한 배려가 더해졌다. 누가 시킨 것도, 무엇을 돌려받으려는 것도 아닌 그저 함께하는 사람들이 좋아서 내어놓는 정성이다.
친구의 바리스타 솜씨도 빠질 수 없다. 좋은 원두를 갈고, 정성껏 로스팅한 커피를 내리며 커피에 얽힌 역사를 이야기로 풀어낸다. 한 잔의 커피에도 지식과 취향이 담기고, 그것을 나누는 사람의 마음까지 더해지니 서늘한 가을밤의 풍미가 한층 깊어진다.
돌아보면 그날의 풍경을 채운 것은 고기와 대하와 커피만이 아니었다. 저마다 다른 방식으로 한 사람의 저녁을 풍성하게 만드는 사람들. 사람들은 그렇게 서로의 삶에 작은 기쁨 하나씩을 보태며 살아간다. 어릴 적부터 사람을 좋아하고 사람들 속에서 나눔을 배워가는 삶의 풍경이 감사하다.
서로의 수고를 알아주고 각자의 선의를 귀하게 여길 때 한 사람의 하루가 따뜻해지고, 그 따뜻함은 다시 공동체의 온기가 된다. 서로의 덕분에 웃고, 누군가의 정성 덕분에 배부르며, 함께한 기억 덕분에 내일을 기다린다.
이렇게 살면 되는 거다. 사랑받고, 사랑하고, 받은 마음을 다른 누군가에게 흘려보내며 그렇게 서로의 삶에 작은 등불이 되어 주는 것. 마지막 잎새가 떨어지는 순간까지 곁에 머무는 사람들의 이름을 귀하게 부르고, 그들의 수고를 알아주며, 함께 웃을 수 있는 날들을 감사히 살아 내는 것.
좋은 사람은 삶을 대신 살아 주지는 않지만 살아갈 힘을 보태 준다. 좋은 관계는 인생의 무게를 없애 주지는 않지만 그 무게를 함께 나눌 품을 내어 준다. 어쩌면 우리가 평생 그토록 찾아 헤매는 행복은 멀리 있는 특별한 무엇이 아니라 서로에게 기댈 품이 되어 주는 이 평범하고도 눈부신 순간들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오늘도 다시 만날 날짜를 정한다. 함께할 날을 기다리는 마음이 있고, 다시 나눌 이야기가 있고, 다음에는 무엇을 함께 먹을까 궁리하는 소소한 설렘이 있다. 날은 반드시 오니까.
인생은 결국, 누구와 무엇을 나누며 살아왔는가로 그 향기가 깊어지는 것이리라.
살아 있다는 것, 사람을 사랑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그 사랑을 다시 나눌 수 있다는 것. 오늘도 이 모든 것에 입맞춤을 한다.
고맙다, 인생아 다시 살아주어서.
글/김영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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