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심을 가지면 질문이 생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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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심을 가지면 질문이 생긴다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게 되면 보이나니, 그때 보이는 것은 전과 같지 않으리라.”
유한준의 글을 바탕으로 유홍준 교수가 풀어 써 널리 알려진 구절이다. 나는 이 문장을 사람 사이의 관계에 가져와 생각해 본다.
관심을 가지면 알고 싶어진다. 알고 싶으면 질문하게 된다. 질문을 건네고 이야기를 듣다 보면, 처음에는 보이지 않던 그 사람의 사정과 마음이 보인다.
분명 얼굴은 같은 얼굴이다. 목소리도 그대로다. 그런데 밉던 사람이 안쓰럽고, 무뚝뚝하던 사람이 듬직하게 느껴진다.
사람이 하룻밤 사이에 바뀐 것일까.
내가 몰랐던 그 사람의 한쪽을 비로소 보게 된 것이다.
우리는 참 빨리 판단한다. 커피 한 잔은 원두가 어디에서 왔는지, 산미는 어떤지, 향은 얼마나 남는지 따져가며 마신다. 그러면서 사람은 몇 마디 나누고 결론을 내린다.
“저 사람 별로야.” “성격이 까칠해.” “말이 없어서 답답해.”
커피에는 설명할 기회를 주면서 사람에게는 사정을 들려줄 시간도 주지 않는다. 사람의 속이 커피잔보다 얕을 리 없는데 말이다.
이런 장면을 떠올려보자.
모임에 나올 때마다 시계를 들여다보는 사람이 있다. 식사 중에도 휴대전화를 확인하고, 이야기가 무르익을 만하면 먼저 일어난다.
“벌써 가려고?” “네, 오늘은 먼저 가보겠습니다.”
한두 번이면 그러려니 한다. 그런데 매번 그러면 서운해진다.
‘우리 모임에 정이 없나?’ ‘밥만 먹고 가는 건가?’ ‘자기 시간만 소중한 모양이군.’
그러던 어느 날 사정을 듣는다. 집에서 거동이 불편한 배우자를 돌보고 있단다. 잠시 대신 봐줄 사람이 있을 때만 모임에 나올 수 있단다. 약 먹을 시간에 맞춰 돌아가야 해서 자꾸 시계를 보았단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지난 장면의 뜻이 달라진다.
우리는 일찍 간다고 서운해했는데, 그 사람은 잠깐이라도 얼굴을 보려고 애써 나온 것이었다. 자꾸 들여다보던 시계에는 집에서 기다리는 사람이 있었던 것이다.
다음에 만나면 건네는 말도 달라진다.
“오늘도 와주셔서 반갑습니다. 돌아가실 시간 되면 부담 갖지 말고 먼저 가세요.”
사정을 안다고 당장 큰 도움을 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래도 상대를 불편하게 하던 말 한마디는 줄일 수 있다. 그것만으로 만남이 한결 편안해진다.
스피치 교육 현장에서도 사람을 서둘러 판단하기 쉽다.
말이 없는 학생을 보면 어른들은 답답해한다.
“왜 대답을 안 하니?” “생각은 하고 있는 거야?” “네가 말을 해야 우리가 알지.”
말을 해야 알 수 있다는 말은 맞다. 그러나 말문이 막힌 학생에게는 그 말조차 부담이 될 수 있다.
머릿속에 아무것도 없어서 조용한 것일까. 오히려 생각이 너무 많아 첫마디를 꺼내지 못할 수도 있다.
‘이렇게 말하면 틀렸다고 할까?’ ‘친구들이 웃으면 어떡하지?’ ‘어디서부터 이야기해야 하지?’
망설이는 사이 다른 사람이 먼저 말한다. 기회를 놓친 학생은 다시 조용해지고, 주변에서는 역시 소극적이라고 판단한다.
이때 나는 질문의 크기를 줄여본다.
“길게 말하지 않아도 돼. 네가 고른 이유 한 가지만 이야기해볼까?”
어렵게 대답이 나오면 그 안에서 다음 질문을 찾는다.
“그런 생각을 하게 된 일이 있었니?”
대답할 수 있는 만큼 묻고 기다리면 조금씩 이야기가 이어진다. 처음에는 한마디였던 대답에 이유가 붙고, 이유에 경험이 붙는다. 그제야 학생이 어떤 생각을 품고 있었는지 보인다.
나는 이런 순간에 내 조급함을 돌아본다. 학생이 말할 준비를 하는 동안, 내가 먼저 ‘말을 못 하는 아이’라는 이름표를 붙이고 있지는 않았는가.
관심을 갖고 묻는다는 것은 상대를 내 짐작에 끼워 맞추지 않는 일이다.
“너는 왜 의욕이 없니?”
이 질문에는 이미 결론이 들어 있다. 상대는 자기 이야기를 꺼내기도 전에 의욕 없는 사람이 되어버린다.
“요즘 시작하기 어려운 일이 있니?”
이렇게 물으면 무엇이 그를 망설이게 하는지 들을 여지가 생긴다. 질문 속의 단정 하나를 덜어내는 것만으로도 대화의 방향은 달라진다.
고객을 만날 때도 마찬가지다.
학원에 전화해서 수강료만 묻는 사람이 있다.
“얼마예요?” “몇 번 해야 해요?” “조금만 받아도 되나요?”
자칫 ‘교육보다 돈부터 따지는구나’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자녀에게 필요한 수업이라는 생각은 들지만 형편이 넉넉하지 않은 부모일 수 있다. 이전에 교육을 받고도 원하는 변화를 얻지 못해 신중해진 사람일 수도 있다.
그래서 한 걸음 더 들어가 묻는다.
“수업을 통해 꼭 달라졌으면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제야 가격 뒤에 가려져 있던 걱정이 나온다. 면접 날짜가 얼마 남지 않았다는 초조함, 사람 앞에서 말하지 못하는 자녀를 바라보는 안타까움, 이번에도 달라지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다.
그 이야기를 들어야 필요한 교육과 가능한 범위를 정확히 안내할 수 있다. 관심을 기울일수록 내가 준비한 설명을 늘어놓는 시간은 줄고, 상대에게 필요한 이야기를 하는 시간이 늘어난다.
그런데 낯선 고객에게는 정성을 들이면서 가까운 사람에게는 질문을 생략하기도 한다.
오래 산 부부니까 다 안다고 생각한다. 오래된 친구니까 무슨 말을 할지 뻔하다고 여긴다. 내 자식이니까 성격을 잘 안다고 자신한다.
정말 그럴까.
배우자의 표정이 어제와 다른 이유를 알고 있는가. 친구가 평소보다 말이 없어진 까닭을 물어보았는가. 자녀가 “그냥요”라고 대답한 뒤 삼킨 이야기를 기다려보았는가.
가깝다는 이유로 궁금해하지 않으면 이런 말을 듣게 된다.
“당신은 나한테 관심이 없어.” “아빠는 내 말을 끝까지 들어본 적이 없잖아.”
듣는 사람은 억울하다. 평생 가족을 위해 얼마나 애썼는데 관심이 없다니.
그 애씀도 사실이고, 상대가 느끼는 외로움도 사실일 수 있다. 내가 주려고 애쓴 것과 상대가 필요로 한 것이 달랐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까운 사이일수록 물어볼 필요가 있다.
“요즘 무엇이 제일 힘들어?” “내가 어떻게 해주면 좋겠어?”
다만 질문을 던진 뒤에는 대답을 들을 자리도 내어주어야 한다.
“요즘 힘들지? 그러니까 내가 뭐라고 했어.”
이쯤 되면 상대는 입을 닫는다. 안부를 묻는 줄 알았는데 훈계 시간이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다음부터는 힘들어도 “괜찮아” 하고 끝낼지 모른다.
궁금해서 물었다면 예상 밖의 대답도 들을 수 있어야 한다. 내 생각과 다르다고 곧바로 고치려 들면, 상대가 들려주려던 이야기는 중간에서 끊긴다.
질문의 말씨도 중요하다.
한동안 연락이 없는 사람이 떠올랐다고 해보자.
“왜 연락도 안 해?”
보고 싶어서 한 말이지만 상대는 변명부터 준비하게 된다.
“요즘 어떻게 지내? 소식이 뜸해서 궁금했어.”
이렇게 전하면 자기 근황을 이야기하기가 한결 편하다. 같은 그리움도 어떤 말에 담느냐에 따라 추궁으로 들리기도 하고, 반가운 안부로 닿기도 한다.
물론 사정을 들었다고 모든 행동을 받아들여야 하는 것은 아니다. 반복해서 약속을 어기면 책임을 물어야 하고, 피해를 주는 행동에는 선을 그어야 한다. 충분히 이해하려는 태도와 필요한 기준을 지키는 일은 함께 갈 수 있다.
관심은 판단을 없애는 일이 아니다. 판단하기 전에 알아야 할 것을 더 살피는 일이다.
오랜 경험을 가진 사람일수록 이 점을 돌아볼 필요가 있다. 경험이 쌓이면 낯선 상황을 빨리 알아보는 힘이 생긴다. 동시에 예전에 만난 누군가를 눈앞의 사람에게 덮어씌우기도 쉽다.
‘이런 학생은 많이 가르쳐봤지.’ ‘저런 고객은 늘 저래.’
그러나 서른 해를 가르쳤어도 오늘 처음 만난 학생의 사정은 오늘 들어봐야 한다. 익숙한 표정 뒤에 낯선 고민이 있을 수 있다.
사람은 한 번 보고 다 읽을 수 있는 짧은 문장이 아니다. 시간을 함께 보내며 조금씩 읽어가는 긴 이야기다. 첫 장에서는 몰랐던 사정이 다음 장에서 드러나고, 무심히 넘겼던 한마디의 뜻을 한참 뒤에 깨닫기도 한다.
오늘 문득 생각나는 사람이 있다면 먼저 연락해보자.
“요즘 어떻게 지내십니까? 문득 궁금해서 연락드렸습니다.”
그리고 잠시 내 말 차례를 내려놓자. 그 사람의 오늘을 들어보자.
관심을 가지면 질문이 생긴다. 질문을 건네면 이야기가 열린다. 마음을 기울여 들으면 사람이 다시 보인다.
그때 보이는 사람은, 전과 같지 않을 것이다.
글/화술경영가 윤치영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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