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와 사람 사이, 미래를 읽다(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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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기 좋은 도시가 건강한 도시다 : 일상 속 도시 처방전
가을은 발걸음으로 먼저 느끼는 계절이다. 아침 공기가 서늘해지고 길가의 나뭇잎에 조금씩 색이 들면, 여름 내내 미뤄 두었던 산책을 다시 시작하고 싶어진다. 천고마비의 계절이라는 말처럼 하늘은 높아지고 결실은 풍성해진다. 그러나 가을의 풍요를 누리는 방법이 식탁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운동화 끈을 묶고 집 밖으로 나서는 일도 몸과 마음에 가을을 들이는 소박한 방법이다.
걷기는 특별한 장비나 큰 결심을 요구하지 않는다. 익숙한 길에서 잠시 속도를 늦추고, 바람의 방향과 나무의 표정을 살피면 된다. 차창 밖으로 스쳐 지나가던 풍경도 걸으며 바라보면 새로운 모습으로 다가온다. 골목의 작은 가게, 담장 너머의 꽃, 횡단보도 앞에서 마주친 이웃의 얼굴이 비로소 눈에 들어온다. 걷는 동안 우리는 목적지에 도착하는 사람에서, 지금 이곳을 느끼는 사람으로 바뀐다.
하지만 걷기의 즐거움을 개인의 의지에만 맡길 수는 없다. 보도 한가운데 놓인 장애물, 끊어진 산책로, 빠르게 달리는 자동차, 잠시 쉬어 갈 자리조차 없는 거리에서는 발걸음이 쉽게 위축된다. 건강을 위해 걸으라고 권하기 전에, 누구나 안심하고 걸을 수 있는 환경부터 마련해야 한다. 도시의 건강은 시민이 얼마나 열심히 운동하는가뿐 아니라, 일상에서 얼마나 자연스럽고 안전하게 몸을 움직일 수 있는가에 달려 있다.
걷기 좋은 도시의 조건은 거창하지 않다. 유모차와 휠체어가 함께 지나갈 수 있는 평탄한 보도, 어르신의 걸음걸이에도 충분한 횡단 시간, 낮에는 그늘을 만들고 밤에는 길을 밝혀 주는 거리, 일정한 간격으로 놓인 벤치가 필요하다. 공원에 도착해서야 걸을 수 있는 도시가 아니라, 집에서 공원까지 가는 길도 편안한 도시여야 한다. 가까운 시장과 도서관, 버스정류장이 안전한 보행로로 연결된다면 걷기는 별도의 운동이 아니라 생활의 일부가 된다.
[스트뢰에(Strøget)보행자 거리 - AI가 제작한 삽화]
도시설계와 도시 인문학에서 자주 언급되는 덴마크 코펜하겐의 보행자 거리 '스트뢰에(Strøget)'는 자동차 중심의 길을 사람들이 걷고 머무는 공간으로 바꾼 대표적인 사례로 거리의 주인이 누구인지 다시 생각하게 한다. 거리는 단순한 통로를 넘어 상점과 광장, 거리의 문화가 어우러지는 생활 공간이 된다.
[센강변(les berges de la Seine) - AI가 제작한 삽화]
프랑스 파리에서도 센강변(les berges de la Seine)의 일부 자동차 도로를 보행 공간으로 전환하여 사람들이 물가를 산책하고 쉬어 갈 수 있도록 했다. 두 사례가 전하는 메시지는 분명하다. 도시의 좋은 자리를 자동차에만 내어주지 않을 때, 시민의 일상에도 새로운 여유가 생긴다는 것이다.
대전은 3대 하천인 갑천과 유등천, 대전천을 품고 있는 도시이다. 매일 새벽이면 내가 가벼운 러닝과 산책을 즐기는 곳이기도 하다. 집에서 2~3분이면 도달할 수 있는 곳이지만 산책을 위해서는 4차선, 6차선 도로를 무서운 속도로 달리는 차를 피해야 하며, 신호등의 연주에 맞춰 좌우를 살핀 후 조심조심 입장하여야 하는 곳이다.
세 도시(거리)를 극단적으로 비교한 이유는 좋은 산책길이 있다는 것과 일상 전체가 걷기 좋다는 것은 다른 이야기라는 것을 설명하기 위함이다. 집 앞 골목에서 하천까지, 학교와 일터에서 가까운 공원까지 발걸음이 끊기지 않아야 한다. 물가의 아름다운 길 못지않게 그 길로 향하는 횡단보도와 작은 골목을 살피는 일이 중요하다. 가장 느린 사람도 편안하게 걸을 수 있을 때, 도시의 길은 비로소 모두의 길이 된다.
걷는 시간은 몸을 돌보는 시간이면서 마음을 정리하는 시간이기도 하다. 분주한 하루에 엉켜 있던 생각은 발걸음의 리듬 속에서 조금씩 느슨해진다. 혼자 걸으면 자신에게 귀를 기울일 수 있고, 함께 걸으면 미처 나누지 못했던 이야기를 꺼낼 수 있다. 건강한 도시는 이렇게 몸의 움직임과 마음의 쉼, 사람 사이의 관계를 함께 품는다.
올가을에는 더 멀리, 더 빨리 가야 한다는 마음을 잠시 내려놓았으면 한다. 각자의 몸에 맞는 속도로 걷고, 힘들면 쉬어 가며, 곁에 있는 사람의 보폭에도 눈길을 보내는 여유를 갖길 바란다. 천고마비의 풍요가 식탁의 넉넉함을 넘어, 시민 모두의 건강과 평온이 가득하길 기원한다.
글 / 임승철(충남대학교 스마트시티건축공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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