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아주세요. 세상이 따뜻해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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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아주세요. 세상이 따뜻해져요
옛날에는 배가 아프면 할머니 무릎이 곧 진료실이었다. 할머니는 배 아픈 손자를 무릎에 눕혀놓고 배를 살살 문질러주셨다.
“할머니 손은 약손, 네 배는 똥배.”
참 이상한 처방이다. 배가 아파서 찾아갔는데 내 배를 ‘똥배’라고 하신다. 요즘 같으면 환자가 항의할 법도 하다.
“할머니, 치료만 해주세요. 인신공격은 하지 마시고요!”
그런데도 손자는 할머니 품에서 스르르 눈을 감았다. 배를 문지르는 손길, 나지막한 목소리, 나를 걱정해주는 마음. 그렇게 한참 누워 있다 보면 아픔도 조금 가라앉는 듯했다. 할머니 손에 특별한 약이 발라져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 손에는 따뜻한 온기와 사랑이 묻어 있었다.
손은 약손이었다. 배를 어루만지는 동안 마음까지 어루만져주었으니까.
우리는 살면서 배보다 마음이 아픈 날을 더 많이 만난다. 일이 꼬이고, 사람에게 상처받고, 열심히 살았는데도 내 편이 하나도 없는 것처럼 느껴지는 날이 있다.
그럴 때 누군가 장황하게 충고하면 오히려 속이 더 답답해진다.
“그러니까 내가 뭐랬어.” “네가 마음을 강하게 먹어야지.” “다들 그렇게 살아.”
마음이 아파 찾아갔더니 인생 강의부터 시작한다. 위로를 받으러 갔다가 숙제만 잔뜩 받아오는 셈이다.
그런 날에는 말보다 손길이 먼저일 때가 있다.
“많이 힘들었지.”
그 한마디와 함께 손을 잡아주거나, 상대가 원할 때 조용히 안아주면 꽉 막혔던 마음이 조금 풀리기도 한다. 문제는 그대로인데, 그 문제를 견딜 힘이 생긴다.
‘아, 나 혼자는 아니구나.’
한때 ‘프리허그’가 유행했다. 거리에서 ‘무료로 안아드립니다’라는 팻말을 들고 서로 포옹하던 모습이 기억난다.
생각해보면 재미있다. 우리는 무료 시식에는 쉽게 손을 내밀면서, 무료 포옹 앞에서는 머뭇거린다.
“정말 공짜예요?” “안아주고 나서 보험 가입하라는 건 아니죠?”
그만큼 사람의 온기를 선뜻 믿기 어려워진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서로 반갑게 받아들이는 포옹에는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힘이 있다.
“당신도 소중한 사람입니다.” “오늘도 잘 버텼습니다.”
짧은 포옹 하나가 그런 말을 대신해준다. 가령 시험을 망친 아이가 풀이 죽어 집에 들어왔다고 해보자.
“몇 점 받았어?” “옆집 아이는 잘 봤다던데?”
이 말부터 꺼내면 아이의 어깨는 더 내려간다. 먼저 어깨를 감싸며 이렇게 말해주면 어떨까.
“속상하지? 오늘은 밥부터 먹자. 다음 방법은 같이 찾아보자.”
성적표는 그대로지만 아이에게는 다시 시작할 자리가 생긴다. 실패하고 돌아와도 받아주는 품이 있다는 것은 큰 힘이다.
부부 사이도 그렇다. 하루 종일 밖에서 시달리고 돌아왔는데 현관에서부터 따지기 시작하면 집이 제2의 직장이 된다.
“왜 이렇게 늦었어?” “전화는 왜 안 받아?” “쓰레기는 언제 버릴 거야?”
물론 쓰레기는 버려야 한다. 사랑한다고 쓰레기가 저절로 걸어 나가지는 않는다. 그래도 순서는 바꿀 수 있다.
“오늘 고생했지?”
반갑게 손을 잡아주고 잠깐 안아준 뒤에 부탁해보자.
“이제 우리 집 쓰레기도 퇴근 좀 시켜줄래?”
같은 부탁도 온기를 거치면 표정이 달라진다. 손끝은 참 신기하다. 같은 손인데 삿대질하면 사람을 밀어내고, 손을 내밀면 사람을 가까이 오게 한다. 주먹을 쥐면 긴장이 생기고, 손을 펴면 악수가 시작된다.
혀끝도 한몫한다.
“당신 때문에 못 살아.”
이 말은 마음을 얼어붙게 한다.
“당신 덕분에 살아.”
이 말은 마음을 녹인다. ‘때문에’가 ‘덕분에’로 바뀌었을 뿐인데 집 안의 온도가 달라진다. 사랑하는 사람과 나누는 포옹과 달콤한 입맞춤도 그렇다. 그것이 수명을 몇 년 늘리는지는 쉽게 말할 수 없어도, 함께하는 오늘을 더 다정하게 만들 수는 있다.
다만 안아주는 일에도 센스가 필요하다. 나는 반가워서 안았는데 상대는 당황할 수 있다. 포옹이 익숙하지 않은 사람도 있다.
“반가운데, 한번 안아도 될까요?”
이 한마디면 충분하다. 상대가 편안하게 받아들일 때 온기도 제대로 전해진다. 포옹 대신 악수가 좋다면 악수를 하고, 손길보다 말이 편하다면 따뜻한 말로 반겨주면 된다.
악수하고, 어깨를 다독이고, 안아주는 일은 적극적인 삶의 방식이다. ‘반갑다’, ‘고맙다’, ‘당신을 응원한다’는 마음을 몸으로 표현하는 일이다.
오랜만에 만난 사람에게 입으로만 “반갑습니다” 하지 말자. 반가운 표정으로 눈을 맞추고 손을 내밀어보자. 서로 원한다면 허그도 한번 해보자.
“잘 지냈어? 보고 싶었어.”
굳어 있던 얼굴에 웃음이 번지고, 서먹했던 관계에 온기가 돌 수 있다.
꼬인 인생이 포옹 한 번으로 모두 풀리지는 않는다. 그러나 마음이 조금 풀리면 사람을 대하는 표정이 달라지고, 다시 살아볼 의욕도 생긴다.
할머니는 오래전에 그 방법을 알고 계셨다. 배를 문지르면서 손자의 마음까지 안아주셨다.
오늘은 우리도 누군가의 약손이 되어보자. 따뜻하게 손을 잡고, 진심으로 다독이고, 반갑게 안아주자.
안아주세요. 세상이 따뜻해져요.
세상 전체를 한꺼번에 따뜻하게 만들 수는 없어도, 내 앞에 있는 한 사람의 하루는 따뜻하게 만들 수 있다.
글/화술경영가 윤치영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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